기술의 발전과 게임의 상관관계

2020. 5. 17.


이게 영화야, 게임이야?

2020년 5월 12일에 공개된 언리얼 5의 데모 영상을 보며 처음 내뱉었던 말이다. 일종의 밈이 되어버린 대사긴 한데, 정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저렇게 말했다. 미친 인간들이 모여서 미친 기술을 만들어냈다. 흔히 외계인을 납치/감금/고문해서 이런 오버 테크놀로지스러운 기술을 만들어냈다고 이야기하지만, 어디 그럴 리가 있나. 이는 수많은 인간들이 머리를 맞대고 노력한 결과물이다. 인류에게 다가온 하나의 작은 특이점이다. 업계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기술의 발전은 정말 완벽하게 멋져

어떠한 매체가 발전함에 있어 눈으로 보이는 차이가 클수록 그 놀라움은 커진다. 영화의 경우 단순히 기차가 역에 들어오는 흑백 영상1에서 시작했던 것에 비하자면 요즘의 영화들은 현실 세계를 그대로 가져다놓은 걸로도 모자라 별천지를 눈앞에 보여주곤 한다. 게임의 경우도 비슷하다. 최초의 비디오 게임으로 알려진 퐁에서부터 2018년 올해의 게임 최다 수상에 빛나는 갓 오브 워까지, 게임이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다보면 특히나 그래픽 쪽의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많은 이들이 발전한 기술을 보며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터지는 것에 초를 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앞으로 네 밥그릇 없어질까봐 두렵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긍정하겠지만, 그게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아니다. 할 말이 있는 것은 노동자로서의 내가 아니라, 게임 제작자 지망생 내지는 게이머로서의 나다.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이런 발전을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런 흐름이 만에 하나 불러올 수도 있을 나쁜 시나리오가 두렵고 걱정된다. 음… 극단적으로 줄여보자면, 알맹이의 부재라고 해야할까.

문화 지체

W. F. 오그번이라는 사회학자는 자신의 저서 사회변동론에서 문화 지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기술 발전 속도를 문화가 따라잡지 못하면서 여러 사회적 문제가 생긴다는 말인데, 디지털 소외계층 문제를 예로 들 수 있다. 편하자고 만든 키오스크 주문기 사용에 어려움을 겪고있는 노년층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사회학 이야기가 튀어나와서 당황했을 수도 있겠다. 예시로 든 상황만 보자면 컴퓨터 등의 최신 기술에 대체로 익숙한 사람들의 놀이로 여겨지는 게임과는 별 상관이 없어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이 문화 지체와 비슷한 현상이 게임 업계에서 심심찮게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공적인 게임이란

우리가 누군가에게 게임을 추천할 때 덧붙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결국 재밌다는 말이다. 물론 재미는 여러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평가되는 것이고 각자의 주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인만큼 어떤 게임이 재밌다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플레이해보면 결국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없다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꼭 집어 무어라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래픽은 화려한데 정작 해보니 별반 재미가 없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엇비슷한 느낌이 드는 게임들이 있다. 가끔 가다보면 누구나 알법한 유명한 게임을 쏙쏙 베껴온 것들도 있다. 속 빈 강정, 빛 좋은 개살구가 따로 없다. 이런 게임은 과연 성공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매출이 잘 나온다면 상품으로써는 성공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으로써는 그리 좋은 평가를 줄 수 없다. 이렇게 그래픽은 빠방한데 별로 재미가 없어서 실속을 차리지 못하는 게임들을 보며, 기술이 발전하는 것에 비해 실질적인 재미가 오르지 않는 현상을 나는 게임 지체라고 부르려 한다.

기술 발전 != 게임 발전

기술은 철저히 노잼의 영역이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는 “이 게임은 레이 트레이싱2 기법을 사용해서 꿀잼이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경망3을 이용한 안티 에일리어싱4 알고리즘 덕분에 게임이 더 재미있어!”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간혹 가다 그런 사람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난 그런 사람을 보면 내 표정을 최대한 평온하게 유지하며 조용히 자리를 뜰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아마 당신도 몇십 초 후에 나를 따라서 나올 것이다.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한다. 더 현실적인 그래픽을 위해, 더 원활한 플레이 환경을 위해, 결국은 사용자에게 좋은 경험을 주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문제는 게임의 재미가 기술 발전에 항상 선형적으로 비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두 요소간의 상관관계가 명확하게 존재한다면, 더욱 발전된 기술을 사용해서 만든 게임이 비교적 덜 진보한 기술로 만든 모든 게임보다 확실히 재밌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가지 반례를 찾아낼 수 있다(애초에 재미라는 개념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해당 주장이 명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잠깐 덮어두자).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보자면, 게임을 만드는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게임이 같이 발전하지는 않는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싶은데?

요리하는 방법이 아무리 뛰어나고 해도, 원재료가 맛이 없다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힘들다. 게임 개발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게임의 알맹이를 담당하는, 한 단어나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그 무언가가 발전해야 나는 비로소 게임이 한 단계씩 성장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술 발전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며 얻는 재미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탐구하기 또한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컨대 밸런스를 지키자는 말이 되겠다. 나는 게임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게임을 만들고 싶은 거니까, 한 방면에만 신경을 쏟지 말아야한다. 껍데기와 알맹이 모두 온전한 그런 게임. 나는 그런 게임을 바란다.

Footnotes

  1.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à La Ciotat),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ère), 1895 #

  2. 광선 추적법, 과학백과사전 #

  3. 인공신경망이란 무엇인가?, LG CNS #

  4. 안티 에일리어싱(위신호 제거), ITWorld #